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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서 예술: 보일의 법칙에 대한 재조명

작성자하이브파트너스  조회수1,053 등록일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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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화학사

 

 

경험으로서 예술:

보일의 법칙에 대한 재조명

 

글 I 백성혜(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화학교육과)

 

 

‘경험으로서 예술’은 교육학자인 존 듀이의 저서를 한글로 번역한 책의 제목입니다. 학생들의 일상적 경험을 중시한 듀이 철학은 학문의 성격을 강조하는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으면서 교육에서 사라졌다가

오늘날 다시 그 가치와 의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문중심 교육을 위해 학생들에게 억지로 원자, 분자, 화학결합, 주기율표의 원소에 대한 암기, 아보가드로 법칙에 의한 화학양론적 계산 등을 가르치면서 역효과가 나서 학생들이 화학을 싫어하게 된 원인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억지 교육은 미래의 화학자 양성에 적신호가 되었습니다.

 

듀이에 의하면 심미적 경험과 일상적인 삶의 긴밀한 관련성을 회복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시대의 아테네인들은 예술과 일상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중시했습니다. 이때 예술에는 과학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관이나 미술관 등은 일상적인 경험과 괴리가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의도한 체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이나 과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은 예술가나 과학자, 수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듀이에 따르면, 어린아이들도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재료와 연장을 다루는 활동 혹은 실험 기구를 다룬다면 과학 활동에 몰입한다면 전문가와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듀이는 세련된 경험뿐 아니라, 세련되지 못한 경험이라도 진실한 “하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심미감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의 완성도가 아닌 심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미감은 무엇일까요? 듀이는 무질서한 혼란 으로부터 질서를 찾는 과정, 갈등으로부터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심미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혼란 속에서 오는 저항과 긴장을 피하지 않고 즐깁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 심미감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마라톤 선수가 근육의 고통을 이기면서 달리는 과정에서 엔돌핀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종종 끊임없이 달리고 싶어하는 마라톤 중독에 걸리기도 합니다. 예술가들도 작품 활동에 대한 중독, 과학자들도 연구 활동에 대한 중독에 시달리는 이유가 이런 심미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술가는 감성적 체험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과학자는 이성만 강조하기 때문에 감성적 체험은 하지 않는다는 사고는 편견입니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 1977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과학 이론에서의 시간과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시간의 차이에 대한 앙리 베르그송의 사상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그를 법률가로 만들려고 하자, 그는 범죄심리학 책을 공부하면서 뇌의 화학적 조성에 관심을 가지고 마침내 화학자가 되었습니다.

 

화학자였던 일리야 프리고진은 노벨상을 받은 후 철학자이며 사학자였던 이사벨 스텐저스와 함께 <새로운 연합>이라는 책을 써서 1979년 출판했는데, 그 책은 대단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된 책이 바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입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프랑스 정부에 의해 “예술과 문화 분야의 최고 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학자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는 비가역 현상에 대한 열역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문학과의 대화,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열역학의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과학적 이론이 우주에 감추어져 있으며, 과학자의 연구 과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과학적 창의성은 예술적 창의성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리학자나 화학자는 본질적으로 작가와 같은 저술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저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창의적인 연구를 하고 논문을 작성해 본 화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동일한 연구 자료를 가지고도 어떤 연구자가 논문을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조명해 볼 수 있는 화학자의 활동은 보일의 실험입니다. <리바이어던과 에어펌프>라는 제목의 책에서 과학사학자인 새핀과 새퍼가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에어펌프라는 실험 장치를 고안한 보일의 활동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화학교과서에 제시되는 보일의 법칙에 관련된 입자 모델

 

오늘날 중학교 과학교과서 화학 내용 중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것이 “기체의 성질”입니다. 이 내용에서는 물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로 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입자들의 움직임으로 기체의 부피와 압력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상상한 입자 모델 그림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7세기 영국의 왕립학회 회원으로 활동한 보일이 실험을 묘사하면서 입자의 존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에어펌프 실험 장치를 활용하여 진공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같은 왕립학회 회원이었던 홉스는 보일의 실험적 증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습니다. 즉, 진공 개념을 정의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 개념이 먼저인가? 관찰을 통한 증명이 먼저인가? 이러한 논쟁의 핵심은 진공의 존재가 입자의 존재와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가 존재한다면, 그 입자와 입자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진공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최소 입자가 없다면 물질은 계속 쪼개질 수 있으니 진공은 없어도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존재”를 의미하는 진공 개념은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2000년간 지속한 논쟁거리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따라서 자연은 공간을 공허한 채로 두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이라도 이용하여 당장 그 공간을 채우려 해서 진공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 때문에 17세기까지 사람들은 원소설로 물질의 특성과 변화를 설명하였습니다. 화학의 발달이 진공 개념에 발 묶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럽 과학을 지배해 온 원소설을 믿고 있던 홉스는 보일의 주장에 펄쩍 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한 홉스의 태도에 대한 보일의 반응은 상당히 창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진공 개념부터 정의하라는 홉스의 주장을 무시하고, 자신의 실험 장치를 작동시키는 과정을 왕립학회 회원들에게 공개하였다. 물론 그가 초청한 회원들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홉스는 제외되었습니다. 홉스도 그 장치의 작동을 보고 싶어 했지만, 그의 공격을 받고 싶지 않았던 보일은 절대로 홉스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장치는 여러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보일은 이러한 기계적 결함을 수정한다면 진공을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실험에 참관한 회원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보일의 법칙은 왕립학회에서 인정하는 과학적 발견이 되었고, 오늘날 과학교과서에 제시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홉스는 과학 실험도 모르면서 과학자를 공격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뒤집어 홉스의 논리적 타당성을 살펴본 것이 <리바이어던과 에어펌프>의 내용입니다. 이 책을 보면, 실험이라는 경험을 예술, 즉 과학으로 승화시킨 보일의 창의적 작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보일의 법칙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